[편지05] 더 깊은 우물을 위하여
- 볼보 할아버지
- 9시간 전
- 4분 분량
사랑하는 손자야,
오늘은 할아버지가
빠르게 변해버린 제작 시장을 바라보며 느낀 걸
조금 길게 들려주고 싶단다.
여기엔 할아버지의 반성도,
네 세대에게 건네고 싶은 작은 힌트도 담겨 있단다.
🔰오래된 세트장에서

옛날, 아주 옛날,
흑백 TV조차 없던 시절이 있었단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네 회사는
광고 미술 일을 해왔어.
그 시절엔 ‘미술감독’이라는 직함도 없었지.
다들 그냥, "어이, 미술!" 하고 불렀단다.
극장 간판을 그리고,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영화 세트를 뚝딱 만들고.
할리우드는 멀기만 한 꿈이었지만,
우리는 붓과 망치를 들고, 묵묵히 우리 길을 걸어왔어.
시간이 흘러, 국내에서도 미술감독의 역할이 넓어지고
세트장 형편도 조금씩 나아졌단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어.
세트는, 여전히 몸으로, 땀으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라는 거야.
지금은 가정을 이룬 4050 아저씨들이 세트팀을 꾸리고,
열정과 체력을 불사르는 2030 청년들(주로 여성들)이 미술팀을 지탱하고 있지.
코로나 시절엔 대기업부터 정부까지 스튜디오 사업에 뛰어들었어.
좋은 스튜디오들이 우후죽순 생겼지만,
지금은 오히려 콘텐츠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아지기도 했단다.
그래도 할아버지네는ㅜ여전히 오래된 세트장을 지키고 있어.
📈 시장은 커졌고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시장이 커지고 환경이 좋아진 건 좋은 일이야.
하지만 그만큼 경쟁도 심해졌단다.
특히 한국처럼 승자독식이 강한 구조에선,
바닥까지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낙수 효과'를 기대하는게 참 씁쓸하지.
(이건 어디까지나 할아버지 개인적인 생각이야.)
경쟁이 나쁜 건 아니야.
하지만 그 경쟁이 누구를 어떻게 다치게 하는지는 살펴봐야 해.
예전 세트업은 참 열악했지.
하는 사람도, 알려진 사람도 거의 없었단다.
덕분에, 할아버지네는
1년에 수백 편 작업을 맡으며 돈도 벌었어.
그때 세트장은 허름한 창고였고,
그마저도 대부분 불법 건축물이었지.
그래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 돈을 번다"는 말이
회사 모토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단다.
⚖ 경쟁은 도구다

경쟁은 때때로 좋은 결과를 가져와.
퀄리티가 높아지고,
가격도 더 합리적으로 조정되니까.
요즘 한국 콘텐츠 미술 수준은
글로벌에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단다.
할아버지는 머지않아 한국 미술팀이 글로벌 미술상을 수상할 거라 믿고 있어.
하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경쟁이 심해지면
디테일을 포기한 하향평준화와 가격 담합 같은 부작용도 따라온단다.
K-콘텐츠가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을 때,
모두가 '지금이다!' 하며 노를 저었어.
세트업자들도 평소보다 높은 마진을 요구했고, 스케줄을 무리하게 받아냈지.
(할아버지도 그땐 뜨끔했단다.)
목마를 때 우물이 보이면
바닥까지 퍼내는 게 우리 스타일이었지.
다음 사람을 위한 물은... 남기지 못했어.
우리는 누구보다 잘 만들지만,
멀리 내다보며 준비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단다.
이건 네 세대가 풀어야 할 숙제야.
🎭 몸값은 마냥 오르지 않는

손자야,
할아버지가 오늘 가장 하고 싶었던 질문은 이거야.
"우리는 계속 더 많이 벌 자격이 있을까?"
세트업을 오래 지켜본 할아버지로선,
이걸 단순한 문제로 볼 수가 없단다.
우린 몸으로 부딪치며 일을 배우고,
돈도 벌고,
때론 담합도 했고,
빠르게 많이 만들기 위해 디테일을 포기하기도 했지.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 독립하면서
세트 견적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단다.
호황기엔 모두 몸값을 높이려고 애썼어.
하지만 지금은 생존을 위해
서로 가격을 깎아야 하는 치킨 게임이 벌어지고 있지.
이 일을 못하게 되면 당장의 보험도, 보호장치도 없고,
각자 위험을 짊어지고,
결국 살아남는 사람이 이기는 구조야. 멀리 보기가 힘들단다.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이건 오래된 업계 정서야.
🔥 높은 몸값은 잘못한게 없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일하는 건 세계 1등이야.
그 덕에 경제는 성장했지.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상처도 깊단다.
빈부 격차는 커지고,
건강하지 못한 방식이 굳어버렸어.
요즘 배우들의 출연료 얘기가 많은데,
할아버진 그걸 보면서 뜨끔했단다.

우리가 모두
기회가 왔을 때 몸값을 올리려고 했던 모습과 겹쳐 보였거든.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는 소수야.
넷플릭스 기준으로는 스무 명 남짓. 대부분 남성이야.
그렇다고 배우들을 탓할 순 없어.
기회가 왔을 때, 최대한 활용하는 것.
그건 우리 모두의 선택이었으니까.
다만,
소수가 너무 많은 걸 가져가면
생태계는 결국 유지되지 않는단다.
우리는 세대를 넘어 살아남을 방법을 고민해야 해.
지금은 그저 빨리 달리는 게 아니라,
오래 걷는 법을 배워야 할 때야.
👥 가지 않았던 길을 가려면

손자야,
콘텐츠 시장은 겉으론 참 넓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건 아니란다.
세트업에 종사하는 사람?
전국 통틀어 1,000명도 채 안 돼.
미술팀까지 합쳐야 겨우 몇 천 명.
방송과 광고 산업을 모두 끌어모아도
정규직, 비정규직 다 합쳐야 12만 6천 명 정도지.
그마저도 프리랜서는 제대로 잡히지 않는단다.
이렇게 적은 사람들이
현장을 지탱하고 있어.
그래서 할아버지는 점점 더 절실히 느끼는 거야.
이제는 ‘리더십’이 필요한 때라고.
누가 어떤 기준을 세우고,
그걸 어떻게 지키느냐.
한 명이 영화감독이
표준계약서를 쓰고,
일한 만큼 정확히 입금하고,
미성년자 배우들의 교육 환경까지 챙기니 환경이 변했단다.
넷플릭스 같은 해외 콘텐츠 구매자들도
돈을 아낌없이 쓰는 대신,
높은 기준을 요구하지.
그런데 문제는,
그 기준에 걸맞게 자원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야.
분배에 신경을 쓸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리더란다.
결론은,
결과물은 좋아졌지만,
그 결과를 위해 많은 이들은 희생이 되고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단다
우리는,
아직도 매일 밤을 새우고,
어깨를 다치고,
마음을 갈아넣으며 경쟁하고 있어.
🌏 계속 좋은 걸 만들 수 있으려면

우리는 정말 많은 걸 해냈단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모든 걸부정하고 싶지는 않구나.
우리는 정말 열심히 달려왔고,그 덕에 이만큼의 성장을 만들어냈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여정이었다고 할아버지는 생각한단다.
하지만 이제는 방향을 조금만 틀어보면 어떨까 싶구나.
속도를 잠시 늦추고,관성을 잠깐 내려놓고,하나씩 습관을 바꾸어보는 거야.
너무 큰 걸 바꾸려 하기보다,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는 거지.
그렇게 하루하루 쌓이면,
우리는 분명누구보다 건강한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 거야.
왜냐고?
우린 이미,이만큼 해낸 사람들이니까.
💞 더 깊은 우물을 남기기 위해 회사가 할 수 있는 것
말 뿐이면 안되겠지?
손자야,
할아버지는 우리 세대가 이런 노력을 하면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단다.
임금 격차를 줄이자.
한솥밥 먹는 조직에서 가장 많이 버는 사람과 가장 적게 버는 사람의 차이는
수십, 수백 배가 되어서는 안 돼.
단기 수익에만 집착하지 말자.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어야 해.
결국 ‘또 찾아주는 사람’을 만드는 게 진짜 성공이야.
노동 환경을 삶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
회사가 개인에게 줄 수 있는
교육과 복지 시스템
리더는 가장 잘 듣고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한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회사가 필요 없단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정이 아닌 미래에 좋은 결정
물론,
누군가는 이런 걸 사치라고 말할 거야.
"살아남아야 뭘 하든 하지."
맞는 말이지.
하지만 반대로,
이런 지향점이 없는 회사는 결국 살아남아도 무너진다는 걸
우리는 이미 수없이 봐왔단다.
네가 일할 미래의 생태계가,
결코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야.
물을 퍼낼 때마다,조금은 더 깊게,조금은 더 넉넉하게.
그렇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우물을 남겨줄 수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우리 모두의 마음도,
세상도 조금 더 편안해져 있을 테지.
사랑하는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