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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02]진수가 자장면을 배달해주었다

  • 작성자 사진: 볼보 할아버지
    볼보 할아버지
  • 3월 20일
  • 3분 분량

'그가 세트 일을 함께 하면 어떨까'


안녕, 내 사랑하는 손자야.

한 주만에 또 편지를 쓴다. 잘 지내고 있니?서울엔 요즘 ‘미세먼지’라는 게 많다고 하더구나. 할아버지 어릴 적엔 그런 게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땐 그냥 숨 쉬면 숨 쉬는 줄 알았고, 하늘은 늘 그렇게 흐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기계가, 수치가, 다 알려주니까 ‘이게 나쁘다’, ‘저게 위험하다’고 아는 거지.


근데 말이다,그렇게 다 알 수 있어도, 마음이 꼭 편한 건 아니더구나. 정보는 넘치는데, 마음 붙일 데는 더 줄어든 것 같은 게…그래도 할아버지는 아직 ‘편지’가 좋단다. 너한테 꼭 답장이 오지 않아도,네가 핸드폰을 잠깐 내려놓고 이 편지를 읽어줄 거라고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따뜻해지고, 한참 혼자 있어도 덜 외롭네. 말이란 건 누군가 듣는다고 믿을 때 살아나는 거니까.

얼마 전엔 우리 세트장에서 자주 오는 배달 청년하고 이야기를 좀 나눴단다.우리가 워낙 자주 영빈관에서 중국음식을 시켜 먹다 보니 거기 배달 오던 친구하고도 눈이 익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지. 젊은 친구인데도, 오토바이에서 내릴 때면 항상 바르고 정중해서 어느 날은 해가 지고 어스름할 무렵, 내가 벤치에 앉아 있다가 말을 한번 붙여봤단다.



(어스름한 저녁, 세트장 앞 벤치)
(어스름한 저녁, 세트장 앞 벤치)

할아버지: “진수 왔구먼. 오늘도 야무지게 달렸나?”

진수 (헬멧을 벗으며): “네. 뭐… 오늘은 좀 느렸어요. 날씨도 꾸물꾸물 했고요.”


할아버지: “그래도 얼마는 벌었을 거 아냐?”

진수 (웃으며): “한 14만 원쯤이요.기름값도 들고, 점심은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고…손에 남는 건 10만 원쯤 될까 말까예요.”


할아버지 (고개 끄덕이며):“돈이 바로 손에 들어오니 좋긴 하지. 허지만 하루만 아파도 끊기잖아. 보험도 없고, 사대보험도 안 되고…”

진수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쉴 수가 없어요. 몸이 안 좋아도 콜이 잡히면 무조건 나가야 해요. 하루 안 뛰면 불안하거든요. 계속 잡아야 좋은 콜이 들어오더라고요.”


할아버지:“딴 일은 안 찾아봤나?”

진수:“찾아봤죠. 사무직도 이력서 넣어보고, 막노동도 해보고…근데 사무직은 연락이 없어요. 나이도 애매하고, 경력도 없고요. 막노동은 몇 번 나갔는데, 손에 쥐는 돈은 비슷한데 몸이 더 상하더라고요. 아침 6시에 나가서 하루 종일 허리 굽히는 건… 제 몸으론 오래 못 버텨요.”





할아버지:“그럼 여기 세트장 목수 일은 어때 보이나? 기술도 배우고, 사람도 만나고…혼자 바람 맞으며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진수 (살짝 웃으며):“목수 일이요… 멋있긴 하죠. 사실 할아버지네 사람들 일하는 거 볼 때마다 ‘손맛’이 있다는 게 부럽긴 했어요. 근데 솔직히… 쉽게 다가서기가 어렵더라고요.”


할아버지:“뭐가 그렇게 어렵더냐?”

진수:“책임이 큰 일 같아요. 목수는 한 번 들어가면 오래 해야 하잖아요.그리고… 일도 잘 안 가르쳐준다던데요? 괜히 시작했다가 피해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요.”


할아버지:“일이란 게 원래 어깨너머로 배우는 거지.그렇다고 혼자 하라는 게 아니야.마음만 있으면, 가르쳐주려는 사람도 있을 게다.너처럼 눈 빠르고 손 야무진 친구, 우리 현장에서도 반가운 사람이야.”

진수:“근데 전 지금 ‘나 자신’ 챙기기도 벅찬 상태예요. 누군가와 같이 뭔가를 만들어간다는 게…좋은데 무서워요.배달은 상사도 없고 밑에 사람도 없잖아요. 그게 제일 편한 점이긴 하죠.”

할아버지:“혼자니까 편하지만, 혼자라서 외롭기도 하지 않냐?”

진수 (고개를 살짝 떨구며): “네. 콜 기다리며 1시간 서 있을 때면…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잠깐 호출 말고는, 누가 날 찾진 않거든요.”


할아버지: “그럼 지금 네 일은 만족스럽나?”

진수 (고개 숙이며): “…처음엔 그랬어요. 시간 자유롭고, 돈도 바로 들어오고.근데 요즘은 그냥 버티는 기분이에요.‘오늘 하루 빨리 지나갔으면’ 싶고, 심심해서 친구랑 계속 통화하게 되고 그래요.”


할아버지: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거다. 우리 세트장은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곳이야.실수해도 같이 배우면 되지. 일주일만 해보지 않겠냐?”

진수 (긴 침묵 후): “…말씀은 정말 감사한데요. 근데…”


할아버지:“‘하지만’이 있구나.”

진수: “지금은… 아직 아니에요.뭔가를 ‘시작’할 자신이 없어요. 무너지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커요. 배달은 무너지면 그냥 앱 끄고 집 가면 되거든요. 근데 세트장은… 사람들한테 피해주잖아요. 책임지고 질타 받는 게 무섭기도 해요.”



할아버지: “무서운 마음도 노동이여. 그 마음도 들고 다니며 살아가는 거지.아직 배워볼 순 있잖아?”

진수: “배워보고 싶단 마음은 있어요. 요즘은 일 배우면서 돈 받는 게 귀하잖아요.”


할아버지: “처음엔 누구나 배워야지. 세트 치우는 일부터 하면 될 거야.크게 어렵지도 않고, 돈도 줄 거고.”

진수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할아버지: “그래.네 자리는 비워둘게. 마음이 좀 쉬어지면, 그때 와.”

진수 (작게 웃으며):“네… 감사합니다. 진짜로요. 또 뵐게요.””




짧은 대화였는데도 아직도 진수의 눈빛이 떠오르는구나.그 빛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태호야,아마 너는 지금 이 말들이 다 와닿진 않을지도 모르지만,언젠가 너도 ‘어떤 길’을 앞두고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될 거다.


그땐, 네 마음이 너무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그리고 언제든, 여기 세트장으로 놀러오렴.네가 좋아하는 탕수육 시켜놓고 기다릴게.이야기 나눌 사람, 여긴 늘 있단다.


오늘도 편안히 쉬어라.


– 할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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